주일예배

[2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복음에 빚진자 | 2017.12.10 18:42 | 조회 3292

20171210[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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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숭 목사

 

서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가? 안 믿는 것 같다. 왜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14절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할 이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유일한 방법이 성육신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으로 나타나신 이유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을 보았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 모든 문제가 끝났다는 것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문제가 문제자체이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기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본 믿음이 없기에 문제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일으키심을 모르면 사람이 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잘하고 못하고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견인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본 믿음을 갖게 하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신 것이다. 신자들에게 문제는 많고 적고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모르면 하나님을 알수가 없다. 문제에 잡힌다. 사는 것자차게 문제투성이이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고 5:17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했다. 매일 육신에 보이는 것만 살던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말씀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것은 말씀을 보라, 외우라,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없다. 우리의 상태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모르는 것자체가 저주, 멸망이다. 그래서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말씀이라고 하면 굉장한줄로 아는데 이론만 바꾸면 이상하게 된다. 예수 이름을 시시하게 여긴다. 신자들이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만큼 문제가 생긴다. 국가의 문제, 세상의 문제는 신자 때문에 생긴다. 세상을 잡고 있는 모든 흑암의 권세를 무너뜨리도록 신자를 부르셨다. 그래서 신자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안하기에 문제가 온다. 똑바로 못해서, 실수를 해서 오는 문제가 아니다. 이렇다면 고치면된다. 상식이다. 상식이하도, 이상도 아닌 상식으로는 해결할수 없는 일이 온다. 세상을 살릴 신자가 하나를 놓쳐서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다. 예수를 말한다. 예수를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다.

세상에 우상이 많고, 종교가 많고, 이슬람 같은 테러를 저지르면서도 알라만이 오직 신이라고 하는가? 흑암이 안 꺾여서이다. 흑암을 꺾을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을 놓쳐서 그렇다. 그러면 우리가 찾아야 한다. 말씀이 무엇인가?

이 말씀을 볼 때 신앙이 희미해지고 시시해질 때 잡는다. 내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 신자의 문제는 예수의 이름을 모를 때 온다. 예수 이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증거가 예수 이름이다. 이 이름을 가진 자가 알 것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다. 신자의 문제는 예수를 잘 모른다. 내 안에 계신 예수, 이미 들어와 계신데 모르니까 못 누린다.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 예수 이름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마음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으로 안 보이면 소용없다.

통장이 없어져서 통장 내역을 뽑으려고 가니까 통장에 도장이 아닌 싸인으로 하면 된다고 한다. 싸인이 나이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싸인만으로 해결되었다. 예수 이름은 어마어마한 이름이다. 그것을 모르게 하는 존재가 있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 그런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예수 이름으로 나에게 나타나셨다. 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믿음이 생긴다. 어마어마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 안생긴다면 신앙생활을 잘 못한 것이 아니다.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둠에 갇혀있는 만큼, 잡혀있는 만큼 알수 없다. 내가 애쓰고와는 상관없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 자체로 알아야 한다. 감정으로가 아니다. 말씀자체로 예수 이름을 확인해야 한다.

말씀으로 내가 믿는 예수가 맞다는 확인을 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다. 불신자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복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고 신자에게 전하는 것은 복음은 말씀안에 있는데 복음으로 복음을 깨닫게, 말씀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신자를 팀사역하는 것이다. 구원은 받았으나 복음으로 기도를 깨닫지 못하기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하기에 신앙이 무너진다.

돈은 답이 아니다. 이부식안수집사가 불편할 뿐이라고 한다. 돈은 행복은 아닌데 불행이 될수 있다고 하는데 돈이 없어도 행복해야 한다. 불행하다면 근본을 모르는 것이다. 어느날 돈이 부러웠다. 그런데 돈은 답이 아니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이 답도 없는 것을 가지고 답을 찾으려고 하기에 안된다. 답을 찾으려면 말씀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 감정이 더해지는 곳으로 들어가봐야 소용없다.

아일이는 안 우는 아이인데 생각이 많아지면서 운다. 그런데 웃을 때가 있다. 할아버지를 찾으면서 인형을 가지고 왔다. 인형을 가지고 놀아줬더니 가지고 오는 것이다. 사람 웃기는 것은 별 거 아니다. 그런데 답은 어렵다. 웃었다고, 울었다고 답이 아니다. 여기에는 답이 없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류목사님이 사람의 틀린 소리는 안듣느다고 했다.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언은 안듣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답은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데 답은 아니다. 생명은 아니기에 살릴수는 없다. 들을 필요는 있지만 살리지는 않는다. 이것이 깨달아져야 말씀에 집중한다. 좋은 의견은 말할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아니다. 남의 소리를 듣지 말라가 아니다. 이것만이 길이라고 할수 없다. 민주주의가 길인가? 공산주의 입장에서는 틀렸다. 시장경제가 길인가? 막스주의자에게 물으면 타락이다. 시장경제는 인간의 타락성을 인정하고 들어간다. 인간은 모든 것에서 남보다 더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같이 나눠갖자는 것이다. 복지가 그래서 문제이다.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받아서 못하는 사람에게 줘야 하는데 맛을 들이면 일도 안한다. 인간의 타락성이다. 자유시장경제는 그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인정하고 말한다. 이것을 무엇으로 말할까? 경험상으로 말할 뿐이지 답은 없다. 답은 한군데 밖에 없다. 말씀이다. 내 생각이 틀렸다. 겉으로보기에는 그럴수있지만 답은 아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는 것이다. 말씀이 무엇인가?

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태초는 영원의 세계이다. 시간의 세계가 아니다. 1:1 시간의 세계, 역사를 말한다.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역사이고 영원은 시간이 없다.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오늘이다. 시간은 영원을 통제할수 없다. 여기에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말씀은 영원이라는 것이다. 이 영원의 세계를 알아들을수 없기에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글로 깨달으려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인간 지식으로는 기껏해봐야 시간의 세계이다. 말씀은 태초부터 있던 것이다. 그러면서 말씀은 곳 하나님이라고 했다. 말씀은 영원하시다. 우리가 이해 못할 뿐이다. 원래는 이해했었다. 영원세계를 알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창 3장 사건 이후로 시간에 갇혀서 영원을 뛰어넘을수 없다. 그것이 육이다. 육일지라도 영적 존재이다. 영적문제가 있기에 모를 뿐이다. 말씀이 안 깨달아진다는 것은 영적문제이다. 말씀은 내가 이해하는 세계가 아니다. 흑암에 잡혀있는 세계속에서는 이해가 안된다. 영원의 세계이다. 태초부터 있는 세계를 말한다. 하나님이 태초이다. 마지막이시다. 이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주셨다는 것이다. 이분이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를 말한다. 이렇게 예수를 알아야 한다. 예수가 성육신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은 막연한 하나님 존재의식이 아닌 영원의 세계를 알리시는 것이다. 영원한 세계에 계신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은 나도 영원한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죽음도 뚜어넘을수 있다. 시간을 뛰어넘을수 있다. 그래서 영원한 존재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말씀이 계시는데 태초에 계신다.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모든 것의 근본이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아져야 물을 먹는 것도 의미가, 호흡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호흡은 숨을 들이쉬는 정도가 아니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모든 것에 그리스도가 있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존재인데 흑암에 잡혀서는 모른다. 말씀이 이해되어야 한다. 말씀으로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오늘 깨달은 말씀이 또 다르다. 성령은

센트럴파크에 가면 물레방아가 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은 항상 똑같다. 그런데 안 돌아가고 있었다. 이유는 물이 없어서이다. 전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없기에 전기로 돌렸다. 물레방아가 아니라고 했었는데 물레방아는 항상 물이 있어야 한다. 물레방아에 무엇이 있기에 과거도 생각하라고 만든 것이다. 물레방아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다. 물이 항상 있어야 돌아간다. 물이 없이는 돌아갈수 없다. 인간은 돈을 많이 벌어도 죽는다. 나를 살리는 것은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없이는 오늘도 살수 없다.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생기가 안돌아간다. 사업을 잘해도 소용없다. 사람은 말씀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만드셨다. 원리가 그렇다.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드셨다. 먹기만 해서는, 쓰기만 해서는 안된다. 말씀과 함께 먹기도, 쓰기도 해야 한다. 사람은 별 것 아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똑같은 물이 흘러가는 것 같은데 어제의 물로 오늘을 살릴수 없다. 오늘 물레방아를 돌리려면 오늘 새로운 물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오늘 은혜받은 말씀이 있어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단순히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받는 것이다. 내 안에 생명이 있기에 생명을 지속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없으면 어둠이다. 오늘 나를 살리는 말씀이 없으면 어둠이다. 외우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물로 오늘을 살릴수 없다. 오늘의 물은 오늘 나와야 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오늘을 살려야 한다. 이 순간을 살려야 한다. 왜 그런가? 사람의 문제는 다양하다. 어둠은 하나인데 나타날때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하나밖에 없다. 말씀없이는 오늘을 살릴수 없다. 말씀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성육신 하셨다. 그래서 내 안에서 그 영광,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인 삼위일체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내 안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나를 말씀으로 움직이신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해야 한다. 오늘도 회복해야 한다.

어느 목사가 두 번 만났는데 하는 말이다. 자기가 살아오다보니까 중요한 하나만 놓치고 주변의 것만 잡고 살았다는 것이다. 말씀도 껍데기를 잡았다는 것이다. 말씀을 왜주셨나? 왜 육신이 되셨나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이다. 말씀으로 그 안의 것을 누리는 것이다. 말씀이 없으면 그 안의 것이 내것이 안된다. 성육신 하신 것은 그 안의 것을 내것으로 하시기 위해서이다. 내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있으면 안의 것이 있어야 한다. 내가 힘들다는 것은 내 기준이다. 그 안의 것은 영원하다.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생명으로 나타내셨다. 부활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나타나셨다. 생명은 죽음을 이기는 것으로 보이셨다. 엄밀히 우리는 죽은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신 주님이 오셔서 살리셨다. 그 안의 것이 누려져야 한다. 예수 이름을 누리면 하나님은 생명으로 역사하시기에 힘들어도 괜찮다. 생명이 나를 살리는 것이지 문제 해결이 살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내 마음에서 영광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났다고 하면 끝이다. 나에게 죽음이 있기에 생명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는 생명이 없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이것을 무엇으로 살리는가?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다. 성육신, 십자가, 부활이 매 순간 답이 되도록 누려야 한다.

빛이 아닌, 어둠, 생명아닌 죽음은 간단하다. 미운 것은 죽음이다. 참으려고 하면 더 강해진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인정하는 것이다. 난 역시 죽음을 이길수 없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생명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이 나를 살린다.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리스도가 생명이라면 그리스도가 왜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가? 힘들어서? 복잡해서? 왜 주인이 되셔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생명이고 빛이라면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셔야 하는가? 그리스도 외에는 다 죽음이기 때문이다. 사망이다. 놀랍다. 어느 정도로 사람들에게 필요한가? 9절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오늘 잘살면 된다고 하면 그리스도가 필요없다.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라는 것은 각 사람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이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어둠이 그리스도를 모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내가 할수 없어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 아니다. 어둠 때문에 빛을 모셔들인 것이다.

우리의 일이 빛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내가 바르게 하면 된다고 하면 빛은 필요없다.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이 창조한 백성인데 영접하지 않는다. 흑암에 잡혀있다. 내가 흑암에서 빠져나왔다는 비밀은 그리스도가 나의 빛, 생며이다. 그리스도없이는 살수 없다. 그리스도로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 생명과 어둠을 밝히는 빛을 하나님은 하나로 주셨다. 그것이 영접이다. 영접을 12절에 말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생명이 있는 말씀이요, 빛이 있는 말씀이기에 예수 이름을 믿는 순간 생명이 임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어둠은 나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 자녀이다. 그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 자녀되는 권세가 있다. 이 권세는 예수 이름을 누릴수 있는, 사용할수 있는 권세이다.

내가 누군가를 믿는다고 자동차 키를 맡길수 있다. 그 말은 운전을 맡긴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탄도 이길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용할수 있는 이름을 주신다. 내가 다 가진 것이다.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 때문이다. 예수 이름이 없으면 하나님은 일하실수 없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예수 이름을 주셨다.

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동문서답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 일이냐고 하는데 말씀하셨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으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예수님이 보내신 자이시다. 예수를 요 20:31절로 믿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의 증거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이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을 따로 믿을 필요가 없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증거이다. 이것이 놀랄 일이다. 흑암이 무너진 사람, 멸망이 꺾인 사람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 더 이상의 체험이 필요없다.

내가 힘들다고 하는데 컵에 물은 물을 마시라고 한 것이다. 이 컵에 물이없고 물을 담으라고 컵을 만들었다면 물이 없다, 많다가 중요치 않다. 나를 만드셨는데 하나님 형상 가진 존재로 지으셨다. 내가 문제가 산더미같이 많다고 해도 내 존재를 알고 있으면 된다. 내 존재는 내 근본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 문제도 끝난 것이다. 문제가 많아도 존재를 알면 된다. 하나도 문제가 없어도 존재를 놓치면 안된다. 존재를 놓친 사건, 빼앗긴 사건이 선악과 사건이다. 그때부터 사탄의 노예되었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이시다. 망하지 않는다. 진짜 믿는가? 문제가 많고 없고가 나를 살리지 않는다. 원래는 그리스도 있는 존재이다. 있어도 없어도 그리스도 놓치지 않으면 된다.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된다. 그것으로 나를 살리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듣기가 어렵다. 이유는 다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기준에 잡혀있는 만큼 그리스도 자체가 안 깨달아진다. 그리스도를 알려면 그 기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잡은 흑암이 꺾여야 한다. 누구나 다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없애라면 말이 안된다. 묶이지 않아야 한다. 화가 날수도 있으나 화에 잡히지 않으면 된다. 방법은 그리스도로 나를 찾으면 된다. 자부심이다. 그리스도가 나를 창조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이다. 아무도 빼앗을수 없다. 자긍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세계이다. 어디를 가도,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 나라이다. 모든 일에 흑암이 무너진다. 자긍심이다. 모자라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믿을 때 성령으로 일하시고 모든 흑암을 꺾으신다. 하늘보좌를 움직이신다. 안 믿으면 안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아들로, 그리스도로 믿으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1:13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흑암에 잡혀있는 자는 모른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으로부터 난 자는 예수 이름에 어떤 약속이 있는지를 아는 자이다. 사람의 지식으로 알수 없다.

오늘 힘이 안난다. 그래도 예수 이름이 있어야 하고, 불러야 한다. 그 이름에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이루실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 이름을 부를 힘이 난다. 이름에 하나님이 이루실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힘이 안난다. 시시해진다. 이것을 종교라고 한다. 힘이 나고 안나고와는 상관없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예수 이름을 부르라고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이 이루실 약속이다. 이 약속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약속을 받은 존재가 약속의 확신을 가지고 살도록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고 만남속에서 성취되고 가는 현장에서 성취되도록 우리의 기준, 수준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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