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2부] 부끄럽지 않은 인생

복음에 빚진자 | 2017.11.19 18:03 | 조회 2852

20171119[2] 부끄럽지 않은 인생 (로마서 1:16-17)

http://ssmc.ipdisk.co.kr:80/publist/VOL1/mp3/171119_2.mp3

http://ssmc.ipdisk.co.kr:80/publist/VOL1/mp3/171119_2.wmv

 

이재숭 목사

 

서론

저는 인생을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사는 것이 늘 부끄러웠다. 어느 정도였는가? 눈 뜨는 것이 싫을 정도였다. 산다는 것이 지겹고, 싫증나는 정도, 사는 것이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다. 그런데 구원받은 날부터는 아닌데 바뀌었다. 구원받았는데 싫었다. 구원받기 전에는 자살도 시도했었다. 결국은 하나님이 죽게 하셔야 죽는다. 구원받고도 싫었다. 자살은 안했다. 혹시 자살하면 지옥간다고 하기에 지옥가기는 싫어서 억지로 살았다. 그러다가 복음이 무언가를 아는 순간부터 내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하나도 달라진 것은 없다. 제일 먼너 내 자신이 알게 되었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복음을 알고나서 사람들을 전도하는데 걸리는 것이 있었다. 복음편지 1과이다. 왜 인간은 행복이 없는가? 행복이 없는 이유를 말하는데 마지막에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이 질문이 나에게 왔다. 다락방을 끝내고서도 행복한지를 질문했었다. 그러다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서 보였다. 내가 행복을 착각하고 있음이 보였다. 그러니까 행복이 매일 누려지게 되었다.

17절을 읽은 대로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이 충격이었다. 믿고는 있는데 오직 의인이라고 했다. 불신자에게 한 말이 아닌 구원받은 자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다. 산다는 것은 생명, 행복이다. 행복해야 한다. 사는 것이 행복하고 기뻐야 한다. 좋아야 한다. 사는 것이 싫은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이다. 그런데 오직 의인은 이라고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그 구원받은 자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내가 믿음으로 못 살기에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가 맞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믿음으로 못살았다. 그래서 사는 것이 부끄러웠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발견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착각하기에 구원받고도 믿음이 없고 설램도 없어지고 구원도 지옥가기 싫어서 받는 정도이다. 교회 온 이유도 지옥가기 싫어서라고 하면 응답이 없다.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 내가 잘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안된다. 죄를 안지으려고 해도 짓게 된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 부끄러웠다.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 나는 빚진 것이 없다. 내가 싫으니까 상대방도 대하기 싫다. 교회도 지겹다. 그런 인생을 10년 이상을 살았다. 교회 간 이유는 여자때문이었다. 여자라도 봐야 살만 했다. 마음이 설레었다. 아니면 교회를 가도 싫증났었다.

교회를 다니면서 1년은 기뻤지만 점점 더 싫증났다. 기도도 응답이 없었다. 사람과 말하기 싫어서 눈 감고 있는 것이지 말씀을 들어도 지쳤다. 내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받았는데 구원의 감격도 1년을 못가니 감사도 없었다. 되는 것도 없었다. 감사거리도 없다. 돈도 없고 애들은 우유도 못 먹였다. 기도를 했는데도 안된다. 직장도 못 들어가니까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불법복제 테이프를 팔았다. 간간히 우유값만 벌었다. 유행가 테이프를 팔았다. 아침에 나가는 것도 싫고, 사는 것이 싫다. 애들은 둘을 낳아서 힘들었다. 겨우 겨우 살았다. 진짜 삶이 싫었다. 결혼하고도 싫었다. 복음을 깨달은 날부터 바뀌었다. 믿음을 잘못 알고 있었다. 내가 열심을, 잘 하는 것으로 알았다. 지옥 가기 싫어서 열심을 낸 것인데 믿음이 아니었다. 하나가 깨달아졌다. 원죄로 온 결과이다. 3장이다. 3장은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잘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이기에 못하면 안된다. 내가 모든 것을 주관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내가 안한 파트가 없었다. 믿음이 아니었다. 믿음이 아닌 죄였다. 그 죄가 내 삶에 결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살기 싫었다.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죄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내 중심대로 사는 것이 죄, 내 중심에 안맞아서 말하고 생각하면 죄이다. 그래서 상처받고 삐친다. 열심히 하고 삐친다. 말 한마디에 삐친다.

너무 힘들어서 새벽에 기도하는데 컵에 꿀물을 타 놓고 갔다. 눈을 뜨니까 있기에 먹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렇다. 그런데 없는 날이 있다. 그 분이 안나온 날은 없었다. 그런데 감사가 나와야 하는데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꿀물도 먹이나? 감사가 없었다. 죄를 몰랐다. 세상이 말하는 죄를 가지고 말했다. 세상은 창 6장 보이는 것을 가지고 죄라고 한다. 보이는 윤리가 잘못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떨어져서 생각하는 것이 죄이다. 내 중심이다. 내 기준으로 생각하기에 행복이 없다. 내 기준으로 판단, 계획하기에 행복이 없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래서 행복이 없다. 구원받고도 그 기쁨, 감동으로 살았다. 1년 동안도 많이 간 것이다. 구원의 축복은 못 누렸다. 내 기준 때문이다. 우리는 죄가 아니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행복은 없다. 구원은 엄청난 축복, 행복인데 나는 안 누려졌다.

복음편지 1과로 고민하는데 류목사님이 대만집회 때 왜 나는 어렵다, 힘들다고 하는가? 맞는데 속은 것이다. 내 기준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도 감사가 없다. 라고 했다. 모든 감사는 복음 때문에 나오지 내 기준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내가 창 6장 속에서 아무리 생각하고 감사해도 안되는 것이다. 내 모든 삶이 세상과 맞다. 그것이 창 11장이다. 세상과 일치하다. 생겨야 감사하고 없으면 감사가 없다. 류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안 맞는다고 했다. 한가지가 보였다. 내 기준을 속이고 있는 사탄이 보였다. 내가 아니었다. 나를 가지고 아담이 만든 기준을 가지고 사탄이 속이고 있는 것이다. 복음 가지고도 행복이 없다고 한다. 사탄의 목적은 이것이다. 감사가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복음 안에 있는 축복을 못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수록 복음이 행복이 안된 것이다. 속았던 것이다. 이것을 본 날부터 집중이 무언지를 깨달았다. 집중은 문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가지고 집중을 하는 것이다.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집중하나? 하나님을 집중하는 것이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집중하는 것이다. 문제가 없어도 하나님이 안 믿어지는데 문제가 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믿어지는가? 하나님된 기준 자체가 이미 문제이다. 왜 문제일까? 그 문제가 드러나면 복음이 힘이 되지 않는다. 복음이 나에게 힘이 되지 않고 밍숭맹숭해진다. 문제가 아니다. 복음을 놓치게 하는 내 기준을 붙잡은 흑암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내 문제가 오면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 가 아니었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내가 행복이 없는 것은, 감사가 없는 것은 내 기준으로 살은 것이다. 3장이다. 보이는 것으로 죄를 말하고 다닌 것이 내 의이다. 내가 하나님처럼 된 것이다. 이것을 누가 심어놓았나? 원인이 깨달아졌다. 이것을 원죄라는 것이다. 죄의 원인자, 나를 조종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12:7-9 옛뱀 마귀가 온 천하를 꾀고 있다. 우리의 구원을 빼앗을수 없다는 것을 알고 구원받은 자의 축복으로 못 살게 한다. 그래서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15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전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는데 할 말이 없다. 구원받은 너희에게도 복음으로 산 비밀을 알린다고 했다. 나는 행복으로 살다가 행복없는 이유를 찾았다. 대만 집회도 우연히 들었다. 복음으로 힘이 안나서 들었다. 내 기준으로 모든 것을 잡았다. 내 의였다. 그래서 감사가 안나오는 것이다. 감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사람은 감사를 만들 수 있다. 누군가 줘야 받는다. 마귀는 절대로 감사를 주지 못한다. 마귀도 피조물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것을 빼앗아 사기치는 것이다. 내 기준에 잡힌 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이 기준으로 살면 복음에 대한 힘이 안난다. 사탄의 목적은 복음만 희미하게 한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믿음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다. 복음이 믿음이다.

로마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것은 복음으로 살기 원한다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기에 믿음이다. 이것을 모르게 하는 존재가 있다. 벧전 5:7-8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염려하지 말라보다 더 깊은 것이다. 염려 할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염려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염려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담이 만들어놓은 것으로 살기에 염려를 가지고 산다.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여기서 보다가 문제가 있어서 염려가 아니라, 이미 염려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원래 있었다. 그 염려가 창 3장이다. 구원을 못받았다가 아니라, 구원받았어도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눈이 열려라라는 말이다. 아비가 라고 하지 않고 대적이라고 했다. 마귀가 원래부터 염려를 가지고 살게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된 것이 염려이다. 내 의가 염려이다. 내가 주인되어서 하는 것이 염려이다. 내게는 힘이 없고 사망밖에 없다. 그래서 내게 유익이 안되면 염려할 수밖에 없다.

이익이 안되는 일은 원래 있는 염려를 끄집어낸 것이다. 교회를 보면 염려가, 불안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염려, 불안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구원받은 자도 해당된다. 그래서 염려가 왔다면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탄이 속이고 있다.

저를 대적하라는 것은 근신하라. 깨어라. 눈을 열라는 것이다. 네가 없다고 사는 것이 염려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 되어서 사는 것이 염려이다. 이것을 마귀가 심어놓은 것이다. 눈이 열려야 한다.

자식 때문에 염려가 아니다. 원래 내가 염려이다. 내가 염려라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하기 원했다. 그래서 만족되는 것이 없다. 불만족이다. 이것이 보일 때 9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사탄은 우리가 어쩔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사탄은 우리가 염려를 안한다고 도망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해결할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들은 힘들다고 복음 놓치고 좋다고 복음 놓치고 좋다고 복음 누리다가 힘들면 복음 놓친다. 복음만 지속안된다. 힘들어도 복음 잡아야 한다. 믿음 가지라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어쩔수 없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다. 하나님의 의로, 저주, 재앙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인간의 의로는 할수 없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한다. 복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를 대적하라 우리는 믿음만 굳건하게 하면 하나님이 대적하신다.

무엇이 걱정되는가? 24시간 걱정 안하고 살수 없다. 그런데 발견되면 감사로 바뀐다. 내가 원래 걱정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되어서 사는 것이 걱정을 안하고 사는 것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것을 회복하시려고 하나님이 복음을 주셨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구원도 믿음이다.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것도 믿음이다. 왜 믿음이 중요한가?

사람은 창 3장에 걸려들면 자기가 잘해야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그리스도 없는 자기가 잘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다가 또 하나가 눈에 보였다.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하는 것이다.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이 믿음이다. 구원받았는데 어떻게 감사가 나오고 내 기준, 내 중심으로 안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얻는 믿음 정도가 아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믿음, 모든 것을 정복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이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믿음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는 것이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떻게 육신으로 안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믿음이 무얼까 고민하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믿음이다. 생며의 성령의 법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면 행복이 없다. 감사가 없다. 예수 믿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약속되어 있다. 이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시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하나님이고 죄와 사망의 법은 사탄이다. 피조물이다. 예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일하지 않는다.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할수 없다. 문제와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집중할수 없다. 거짓이다. 신비주의이다. 집중은 하나님이 주셔야 집중된다. 하나님이 자신을 복음으로 나타내셨다. 우리 인생의 모든 축복을 예수 안에 나타내셨다. 그렇게 행복이 없고 감사가 없을 때는 어쩌다 보면 은혜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는 지속되었다. 지속이 되면 성령의 역사는 결과가 오는데 전도문으로 온다. 지속된 이유는 하나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가 힘이 되었는데 지속된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라는 말이다. 이 말에 다 따라온다.

행복한가? 행복이 없다. 행복없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 말라. 원래부터 행복이 없었다. 그 행복이 없는 사람을 살도록 아담이 만들어놓았다. 3장 내 의, 내가 하나님된 기준이다. 내가 하나님되어서 하기에 염려, 걱정이다. 남편도, 자식도 나에게 맞춰져야 한다. 그래서는 행복이 없다. 다 기준이 다르기에 행복이 없다. 내 기준에 맞는 사람과 결혼했는데 하는 날부터 안 맞는다. 최수종과 하희라만 되는가보다. 그런데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모른다. 죄로부터 왔다는 것을 모르기에 그리스도만 못 찾는다. 그리스도로만 하나가 된다.

류목사님이 창 3, 6, 11장 다른 것으로 살고 행 13, 16, 19장 틀린 것으로, 불신자 6가지 망할 것으로 산다고 했다. 그래서 행복이 없다. 복음 아닌 나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죄이다. 그러면 간단하다. 죄의 원인이 사탄이다. 그 사탄을 무너뜨린 이가 그리스도이다. 요일 3:8 예수 안에 다 있다.

복음 누리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주신 예수에 집중한다. 현장은 내가 현장이다. 현장에는 다른 것이 안 통한다. 틀린 것, 다른 것을 해봐야 망할 것이다. 그 속에서 오직을 잡았다. 다른 것이 필요없다. 현장은 자기 기준으로 산다. 세상과 다른 것이 없다. 그러면 복음 깨달으면 세상기준이 없어지나? 아니다. 잡히지 않고, 해방된다. 묶이지 않는다. 좋은 것에, 싫은 것이 묶이지 않는다. 복음 때문에 일어나기에 좋은 것에도, 싫은 것에도 낙심이 안된다. 돈이 생기면 좋아한다.

장로님의 누님이 미국으로 가시면서 헌금봉투를 내밀었다. 100달라가 들어있었다. 왜 얇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잡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믿음이 그것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100불을 넣어주셨다. 선교헌금으로 바꿔서 10만원을 가지고 왔다. 다 돈이 생기면 좋아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좋아한다. 그런데 응답은 아니다. 흑암이 무너져야 한다. 우리는 그 생각을 못한다. 인간에게 무의식, 잠재의식이 있다. 세상은 대단하다고 한다. 그 의식을 끌어내려고 한다. 그런데 사탄은 안 무너진다. 대단한들 사탄이 안 꺾이면 저주이다. 잠재의식, 무의식에 사탄이 안 꺾이면 저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 다 넣으셨다. 깨달아졌다. 무의식도 필요없다. 오직이다. 돈이 필요없다가 아니다. 생명없는 것에 잡히지 않고 아닌 것에 인생을 두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면 끝이다. 하나님이 오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인간은 창조원리 회복되면 끝이다. 복음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회복하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셔서 창조주를 알라. 그 이름을 주셨는데 예수이다. 이름으로 알라는 것이다. 이름을 놓치면 자기 기준으로 알아야 한다. 내 기준이 복음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것이 사탄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을 가지고 놓치게 하는 사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다. 요셉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알았다.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에 함께 하시는 것이다.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주를 성령을 확신하라는 것이다. 집중이 안되는 것을 가지고 알았다. 내 기준으로는 안되었다. 사탄이 발견되니까 집중이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요일 3:8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것이다.

메시지를 똑같이 할수 있는데 집중이 되면 염려, 걱정, 근심에서 감사가 지속된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메시지를 듣고 힘은 얻었지 내 삶에서 24가 되는 것이 없었다. 안되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니까 집중이 되었다. 사탄이 안 꺾이는 것은 집중이 아니다. 사탄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 아들밖에 없다. 육신을 가지고 잇기에 염려, 근심이 없다. 육신 자체가 사망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 육신 자체가 하나님떠난 죄의 결과이다. 육신을 가지고 집중되는 것은 모든 육신으로는 저주이다.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알수 없다. 그래서 단번에 끝낸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라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다. 12가지에 영향받은 나를 끝내신 것이다. 2:20

나는 끝난 것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죄로 못 보고 보이는 것만 죄라고 생각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끝났다. 불만족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끝났다. 이것을 조금 깨달았는데 지속이 된다.

잠을 못 잤던 사람이다. 생각에 잡히면 가슴이 뛰어서 잠을 못 잤다. 그런데 간단하다. 이런 나를 십자가에서 다 끝내셨다. 저주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 십자가이다. 내 죄만 끝낸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가 움직인 것이다. 제사장의 일을 하신 것이다. 죄가 없어야 보좌가 움직인다. 그래서 십자가가 없으면 보좌는, 제사장의 일은 안 일어난다. 이것만 잡았는데도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려진다. 부활하신 증거이다. 부활이 의미이다. 정복이다. 성령으로 지금 살아역사하셔서 하는 것이다.

오직에 집중하니까 유일성이 온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유일성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안믿으면 하나님이 안 하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것이 드러난다. 나에게 흑암이 꺾인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을 못보면 유일성이 아니다. 자기가 하고는 하나님이 했다고 한다.

아일이가 눈을 뜨면 할아버지를 찾는다. 처량맞게 찾는다. 마음이 약해서 쳐다본다. 그러면 내 기준으로 쳐다보지 그리스도로 안보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안 나타난다. 이것이 유일성이다. 그래서 발견되니까 그리스도를 누렸다. 그때부터 자기 아버지가 나와서 밥 먹이면서 가시라고 했다. 묶임에서 풀린다. 유일성을 못 봤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못 봤다. 작은 것 속에서도 보여야 한다. 그러면 재창조의 일, 하나님이 만드신 나를 보게 된다. 작은 일에서도 보인다. 하나이다. 집중부터 해야 한다. 집중을 무엇으로 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복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는 것이다. 성육신, 십자가, 부활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일이 일어나고 유일성이 일어나고 증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재창조의 작품이 일어난다. 오직으로 살고 유일성의 응답으로 재창조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복음으로 살아지지 않는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마다 유일성의 응답을 주시고 재창조의 응답을 주셔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살수 있도록 하옵소서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1,147개(1/58페이지)
주일예배
번호 제목 날짜 문서 동영상 mp3
1147 [열왕기상 3:1-14] [1부] 하나님 마음에 든 기도제목 2024-04-21 - - mp3
1146 [열왕기상 11:1-13] [2부]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솔로몬 2024-04-21 - - mp3
1145 [열왕기상 15:9-15] [3부] 일평생 온전한 마음을 가진 아사 2024-04-21 - - mp3
1144 [ 사무엘하 16:5-14] [1부] 비난과 저주를 기도로 바꾼 다윗 2024-04-14 - - mp3
1143 [사무엘하 19:24-30] [2부] 왕이 오심으로 만족한 므비보셋 2024-04-14 - - mp3
1142 [창1:26-28] [3부] 성경적 하나님의 형상 이해(중대원3강) 2024-04-14 - - mp3
1141 [ 사무엘상 30:1-10] [1부]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 얻은 다윗 2024-04-07 - - mp3
1140 [사무엘하 8:1-14] [2부]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신 다윗 2024-04-07 - - mp3
1139 [롬16:25-27] [ 3부] 선교포럼-선교의 7.7.7( 중직자 대학원) 2024-04-07 - - mp3
1138 [누가복음 24:1-12] [1부]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자 2024-03-31 - - mp3
1137 [요한복음 11:25-27] [2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2024-03-31 - - mp3
1136 [삼상 12:12-13] [3부] 사람이 택한 왕 2024-03-31 - - mp3
1135 [사사기 6:11-24] [1부] 숨겨둔 큰 용사 기드온 2024-03-24 - - mp3
1134 [사사기 7:1-23] [2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2024-03-24 - - mp3
1133 [사사기 8:22-28] [3부] 기드온의 승리와 실수 2024-03-24 - - mp3
1132 [여호수아 5:1-12] [1부] 애굽의 수치가 떠나간 길갈 2024-03-17 - - mp3
1131 [수 10:1-15] [2부] 전무후무한 응답 2024-03-17 - - mp3
1130 [사도행전 17:6] [3부] 중직자의 길 2024-03-17 - - mp3
1129 [신명기 21:1-9] [1부] 피 흘린 죄를 사하는 암송아지 2024-03-10 - - mp3
1128 [엡 4:17-32] [2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 2024-03-10 - - 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