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

[금] 참 왕되신 그리스도

복음에 빚진자 | 2018.05.25 20:55 | 조회 1439

20180525[] 참 왕되신 그리스도 (디도서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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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숭 목사

 

서론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셨다. 그리스도의 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여신 것이다. 그리고 원죄, 자범죄, 조상죄를 끝낸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를 붙잡고 하나님을 모르게 만드는 사탄을 무너뜨리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가? 그런데 이것은 기초이다. 기초에 계속 있으면 안된다. 이 기초는 내 수준에서 못 벗어난다. 내 기준에서, 표준에서 못 벗어난다. 맨나라 하나님을 만났다가 자기 수준으로 살고 또 만나고 죄 해결되었다고 하고 기준 가지고 삐치다가 십자가 잡고. 사탄에게서 빠져나왔다고 하고 싸우고 육신에 묶이고 부활, 십자가, 성육신을 잡는다. 완전한데에 나아가야 한다.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하다. 여러분을 보면 기초이다. 자신의 수준, 기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속에서는 육신의 성공이 최고이다. 이 기준, 수준, 표준에 머무르는 것은 내 중심에 맞춘 그리스도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나를 찾는 것이다. 나를 찾으면 끝난 것이다. 다시는 사탄이 나를 건드릴수 없다. 오히려 사탄을 정복할 권세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갈 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놓고 그리스도를 붙잡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를 찾으면 내가 살 필요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다. 완전한 것이다. 내 수준속에서나 믿음속에서나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나를 넘어서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 나의 것, 나의 현장을 찾는 것이다. 내 수준과 기준에 잡힌 것이 현장이다. 여기에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발견된 사람이다.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통치라고 한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여시고 십자가에서 죄를 끝내시고 사탄을 끝내셨다. 이 세가지를 끝내신 것이 나를 못 박은 것이다. 알고나면 보좌에 계신 주님이 통치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여러분이 나를 누릴 필요가 없다. 죽었다, 살았다 할 필요가 없다. 끝내야 한다. 일어나면 현장으로 보고 누려야 한다.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천사를 움직이시고 보좌를 움직이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속이는 사탄을 무너뜨리신다. 성경은 선지자, 제사장, 왕의 일을 계속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세가지이다. 선지자, 제사장, 왕의 일을 하셨기에 그 근거를 가지고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선지자이다. 지금도 제사장의 일을 하신다. 왕의 일을 하신다. 이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근거를 잡아야 한다. 자신의 수준이 아닌 성령의 역사속으로 들어가야 하다. 깨달아지면 하나님의 아들을 잡는 것이 달라진다. 내 수준속의 아들이 아니다.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아들이다. 십자가가 천사가 동원되는 축복이다. 내죄가 끝낫다. 보좌가 움직인다. 처음에는 복음도 내 수준속에 믿어서 기쁘지 않았다.

믿음속에서 누려야 한다. 믿음속에서 받는 응답이 있다. 수준에 갇힌 것이다. 여기에서 전도해봐야 영접밖에 안된다. 그나마 준비하는 것도 중요한데 축복은 못 들어간다. 하나님이 보좌를 움직이는 축복을 주셨다. 죄가 끝났기에 당연히 잡아야 한다. 하나님이 왕적 권세를 주셨음을 몰랐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임을 알았다. 통치하고 계시는 것이다.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속성은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영생을 약속했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 당연하다는 것이다.

3 자기 때에 하나님의 때는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창조원리를 회복하시는 것이다. 자기 때이다. 그것을 찾기를 고대하신다. 그래서 아들을 희생시키셨다. 그런데 전도자가 그 희생을 깨달은 것이다.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것이 권세이다. 왕적권세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수 있다는 것이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다. 마귀에게 속으면 내 수준에 갇힌다. 기준에 갇혀서 삐쳤다고 한다. 현장으로 보고 넘어서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힘들다고 해도 소용없다. 효과가 없다. 계속 잡으면 사탄은 계속 쫓아다닌다. 십자가로 끝내야 한다. 사탄은 거기까지만 온다. 하나님이 끝내셨다. 사탄의 사명은 십자가 안 붙잡은 놈을 건드린다. 자신의 것으로 돌아가고 돌아간다. 못 넘어선다. 마귀도 못 넘어선다. 부활의 능력이 임했기에 못 따라온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하는 것이다. 전도를 깨닫는 것이 어마한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깨다는 것이다. 선지자, 제사장, 왕의 일을 동시에 깨달아서 전도자의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지막 주시는 권세이다. 사탄이 따라오지 못한다. 따라오면 자신이 당한다. 무시하면 내버려두고 이 믿음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류목사님이 응답보는 눈이 열린다고 한다. 응답이 이미 와 있기에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대임하는 자로 세우셨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세가지로 하나님은 일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신다. 계시이다. 선지자이다. 그리고 제사장의 기능을 가진 자에게 예배를 받으시고 왕으로 대임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맞고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시하신다. 속성이다. 나를 알아달라시는데 말씀으로 알아달라고 한다. 인간도 자신을 알아달라고 한다. 속상한 것도 말한다. 하나님을 떠난 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이다. 그래서 말씀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2:17절로 드러내셨다. 너를 죽이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한다를 말씀으로 알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놓쳤다. 그러니까 창 3장 문제가 왔다. 하나님을 떠났다, 죄에 빠지고 사탄에게 붙잡혔다. 이 때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 3:15이다. 계시이다. 그래서 말씀을 정확히 잡아야 한다. 많이 아는 것이 중요치 않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 ? 1:27,28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사탄을 무너뜨린 말씀과 나를 회복하는 말씀을 잡아야 한다. 이 말씀의 성취가 구약이다. 이 말씀이 오셨다. 사복음서이다. 완성하신 것이 행 1:1, 3, 8이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완성하신 것이다. 나를 찾아주신 것이다.

이것을 찾아진 사람은 끝난 것이다. 끝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천명이 깨달아진다. 더 이상 연약함 가지고 갈등하고 상처받을 필요, 무시로 갈등할 필요없다. 이것이 안잡히면 옛사람인 나에게 잡힌다. 새사람이 있어야 한다. 옛날 모습에 빠질 사람이 아니다. 다시는 사탄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십자가로 끝내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부활로 계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불러 시키시는 일을 알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 모습에 힘들지 않다. 십자가로 끝내야 한다.

깨끗해야 편한한 것 같은 것은 옛사람의 나이다. 우리는 어지러워도 새사람이다. 어디를 가도 괜찮다. 전도를 하러 가는데 냄새가 나도 들어가진다. 일체의 비결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찾아야 한다. 부활안에서 나를 찾으면 끝난다. 이것이 깊어지고 지속적으로 누려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 부활을 잡는데 예수 이름을 부를때마다 잡혀야 한다.

예수 이름을 부를 때 찾아지는 것은 세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래서 나를 찾아야 한다. 당연히 찾아야 한다. 맨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맞다, 틀리다, 있다, 없다를 한다. 세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면 흑암은 무너진다. 그래서 나를 찾아야 한다. 조금씩 생각나 진다. 이것을 찾는데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걸려들 때가 있다. 말해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로 들어간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다. 근거를 하루종일 잡았다. 걸려서 말하고 싶었다. 성질도, 하소연도 하고 싶다. 비교당하면 낙심도 당한다. 그때 십자가로 들어간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사람의 예배를 받으신다. 하나님은 계시와 예배를 통해서 통치해 가신다.

예수 이름으로 나를 찾는 것이 예배이다. 보이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킴으로 온 인류를 구원할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면서 고통당할수 있다.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은 사랑해서인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다.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구원할수 있다면 고통도 보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았다. 구원해야 할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영생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안 것이다. 자기 때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나타낸 것이다. 전도가 어마한 것임을 안 것이다. 예수 이름 때문이다. 14:13절에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내 아들의 이름을 부를까?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배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의 예배를 받으시기 원하신다. 깨달으니까 예배는 최고의 축복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시간은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음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예배자에게 주신다. 우상숭배자에게는 안 주신다. 이것이 보이니까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온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당연히 기준, 표준, 수준에 없다면 끝냈다면 내가 사는 이유, 믿음의 사람, 영적사실로 사는 자들로 말씀과 예배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받을 자가 누릴 응답이 말씀을 잡는 것이다. 신학은 쉬운 것이다. 기준, 수준 속에서는 신학이 어렵다. 어느 때가 아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보고 끝내야 한다. 끝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못박으셨다. 발견되는 것이다. 내가 거기에 있고 그리스도와 나를 살리셨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나를 축복과 응답을 누리게 하셨다. 말씀을 정확히 잡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을 통해서 내 인생을 움직이신다. 그러고 나니까 나에게 왕권을 주셨다. 왕권은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신 것이다.

구약에도 똑같이 말을 한다.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라라고 했다. 전도자의 권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말씀을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하라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때 나왔다. 다른 것을 말할 필요없다. 3:15, 2:17, 1:1, 3, 8 말하라는 것이다. 전도자의 권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예배때도 목사말이라고 여기면 안된다. 전도자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길을 가는데 백성들이 원망한다. 그때 불뱀이 나온다. 그 말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시시하게 여겼다. 복음을 정확히 몰랐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탄이 온다.

현장에 가니까 전도하고도 불안하다고 했다. 복음을 듣고는 치유가 되었다. 내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니까 권사님이 근거가 뭐냐고 한다. 전도자이다. 말씀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우리는 속는다. 치유되었다는 것도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하필 오늘 말씀이 그렇다. 무엇으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믿는가였다. 흑암이 꺾이는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 흑암이 꺾인 나를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사탄이 못 건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누리는데 수준, 표준, 기준속에서 믿으면 사탄이 건드린다. 속지말라. 묶임이다. 묶임속에서는 응답이 없다 고통뿐이다. 통과하는 기준이 십자가이다. 이속에서는 기쁨이 있다. 옛사람의 나가 살아난다면 십자가 속으로, 부활속으로 들어가면 어마한 내가 보인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나서 욥의 말이 이해가 된다. 23: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복음을 알기 전에는 몰랐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하신 뜻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내게 이루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 뜻이 무엇인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기 전에 욥이 말한다.

23: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잘 보라. 앞으로도 뒤로도 가도 못 본다. 자기 수준이다. 인간수준속에서는 하나님을 찾아갈수 없다. 그런데 욥이 나를 단련하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고백이 13절이다. 깨달았다. 임마누엘은 보이지 않는 임마누엘과 보이는 임마누엘을 안 것이다. 1:27은 일정하다. 1:28이 일정하다.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쉬운 것이다. 뜻이 일정하다. 보이지 않는 임마누엘은 예수 이름이다. 7:14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했다. 임마누엘은 형체가 없다. 보이지 않는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이름으로 주셨다. 보이는 임마누엘은 전도이다. 1:3절이다. 자기 때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다. 누구를 만나면 권세를 사용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쉽다. 이 속에 있는 것을 말하지 말라. 상관없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말하라. 내가 누리고 있는 것, 말씀잡은 것을 말하라. 예배에 나에게 주신 말씀을 잡고 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성령역사는 안 보인다. 보이는 것은 전도밖에 없다. 전 세계에서 성령으로 역사하는 교단이 어딘지 보아야 한다. 그 속에 내가 들어온 것이 응답이다.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이다. 마지막 남은 자가 우리이다. 껍데기에 상처받고 흥분하지 말라.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하는 것이다. 꾸밀 필요없다. 깨닫고도 중요치 않다. 스토리만 되면 된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는 전도자를 만나고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전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때에 전도자에게 맡기셨다. 자신만 하나님이라는 것이 이단이다. 하나님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일하신다. 나에게 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각 기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영권이 나타난다.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은 기준속에서 나오기에 무시하는 것이다. 들리지 않는다. 내가 주기 때문이다. 거기에 머물러 있기에 성령이 안온다. 노력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수준과 상관없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다. 믿어진다. 약속하신 분도, 뜻이 일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욥이 이것을 많은 고난속에서 찾아냈다. 일정하신 뜻이 변하지 않음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성령으로이다. 목사의 종이 아니다. 식주인이고 동역자,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행위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대언하기에이다. 인격으로보면 여러분이 고상할 것이다. 멀쩡하게 사업하고 살림하는 사람과 부족하면서 하는 사람중에 고상한 것은 후자일 것이다.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이다. 권세이다. 우리같은 자에게 대언할 권세를 주셨다. 성령의 역사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권세이다. 류목사님 만나는 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그 메시지를 계속 듣게 하셔서 나의 정체성을 찾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사탄이 못 건드린다. 다 살린다. 그런데 우리 수준에서만 알기에 힘들다. 영적사실이 믿어지면 행복이 온다. 하루종일 행복하다. 내가 안걸리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보니까 약속이 믿어진다. 끝내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보좌에서 나에게 축복하신 것이다. 회복하면 내 수준에 안 잡힌다. 쓸데없이 힘들어하고 내 생각에 무너졌다. 약속이다. 내 수준과 상관없다. 십자가로 잡으면 부활로 들어간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안 살아도 행복하다. 내가 살면 염려, 근심, 걱정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안 건드려도 된다. 내가 안 사는 것이 기도이다. 약속이다. 약속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복음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우리가 드러낼 필요가 없다. 잘했다, 못해다도 필요없다.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입을 놀리고 싶은 사람이다. 자랑하고 싶어서 아일이도 말한다. 약속을 깨닫고 나서는 내가 안 드러내도 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계시이다. 말씀으로, 복음으로이다.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움직이신다.

 

자기 때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고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시고 권세를 누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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